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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애인도우미견의 역사와 사례

    장애인 도우미견의 발자취와 활약상

    장애인 도우미견은 단순한 동물이 아닌, 장애인의 눈과 귀, 손과 발이 되어
    세상과 소통 할 수 있도록 돕는 특별한 존재입니다.
    오랜 역사를 통해 인간과 함께 해 온 이 특별한 동반자들의 이야기는 감동과 희망으로 가득합니다.
    장애인 도우미견의 역사와 그들의 놀라운 활약상을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도우미견의 역사사례

    01.역사

    모리스 프랭크(Morris Frank)와 그의 개 버디, 그리고 '도로시 유스티스 여사

    시각장애인 도우미견Guide Dog for the Blind)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시작됐는지에 관한 확실한 자료는 없다. 특히 우리나라에서 시각장애인 도우미견에 대해 학문적으로 체계적으로 연구한 저작물은 거의 손가락에 꼽을 정도이고 이도 대부분 기술적인 것들이었다. 대략보면, 역사적으로 시각장애인 도우미견의 활용은 동굴벽화등을 통해 고대로부터 그 연원을 살펴볼 수 있으나 체계적인 훈련이 시작된 기원은 1819년 빈에 있는 한 시각장애인학교의 창립자가 펴낸 책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하지만 이는 매우 제한적으로 이루어졌다.

    '시각장애인 도우미견 양성’이라는 목적을 띄고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결정적인 계기는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의 눈을 일순간에 앗아갔던 바로 전쟁, 세계1차 대전이었다. 1차 대전이후 수없이 많은 군인들이 시력을 중도에 상실함에 따라 이러한 군인들의 사회 복귀를 위한 여러 교육과 재활훈련이 시도되었는데 그런 과정에서 1916년 독일 몰덴부르크에 맹인시각장애인 도우미견 학교를 개설한 것에서 비롯된다. 여기서 당시 독일 국견(國犬)으로 유명세를 떨치던 세퍼드가 시각장애인을 인도할 수 있다는 사실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에 따라 1923년 독일 포츠담(Potsdam)에 독일훈련학교(the German Training School)가 세워진 것이 체계적인 시각장애인 도우미견양성의 시작이었다. 이렇게 지역적이던 시각장애인 도우미견에 대한 인식을 세계로 확산시킨 사람은 미국의 '도로시 유스티스 여사 (Mrs. Dorothy Harrison Eustis)로 그 당시 스위스에 살고 있던 미국 필라델피아 태생의 여사는, 독일산 세퍼드의 탁월한 능력에 매료되어, 여러가지 목적견으로 세퍼트를 번식시키고 있었다.

    그 당시 그녀는 번식과 더불어 자체적으로 개발한 훈련 프로그램을 적용하여 세퍼트의 임무 수행 능력을 높이는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포츠담을 방문하여 독일훈련학교를 견학한 후 큰 감명을 받았고, 이는 그녀로 하여금 훗날 최초의 맹인안내견 학교를 설립, 본격적인 시각장애인 도우미견 훈련 프로그램을 개발하게끔 하는 계기가 된다. 때마침 그녀는 ‘The Saturday Evening Post’ 지로부터 원고를 부탁받게 되었고, 그녀는 개들이 시각장애인을 인도할 수 있다는 내용의 “The Seeing Eye”라는 제목의 기사를 쓰게 된다 (1927년 11월 5일자). 바로 이 기사가 시각장애인 도우미견에 대한 관심을 전세계로 확산시키는 시발점이 되었다.

    이 때 이 기사를 본 미국 테네시에 살고 있던 시각장애인, 모리스 프랭크(Morris Frank)라는 젊은 청년이 그녀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는 유스티스 여사에게 자신을 위해 시각장애인 도우미견을 훈련시켜 달라는 요청의 글을 썼다. 청년은 여러 우여 곡절 끝에 그녀와 함께 팀을 이루어 버디(Buddy)란 이름의 개를 선택하여 훈련시켰고 결국 성공, 버디를 미국 최초의 시각장애인 도우미견으로 등록하게 한다. 그 후, 1929년, 사재를 털어 프랭크와 함께 ‘The Seeing Eye’(www.seeingeye.org)라는 세계 최초의 전문 시각장애인 도우미견학교를 설립, 1929년 2월, 2명으로 시작했던 최초의 수업을 시작하였다. 그 해 훈련받은 시각장애인 도우미견으로 인해 독립을 되찾은 시각장애인은 모두 17명이었다.한편, The Seeing Eye는 국제적인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여 영국에서의 시각장애인 도우미견 훈련학교 설립의 기틀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현재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하게 된 영국의 체계적인 시각장애인 도우미견 훈련은, 1931년 왈라시(Wallasey, Cheshire)의 클리프(The Cliff) 훈련센타에서 시작되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1940년대부터 일대 부흥기를 맞는다. 영국에 6개의 시각장애인 도우미견 전문훈련학교가 세워지고 여러 유럽국가들도 시각장애인 도우미견학교를 건립하게 되었다. 70년대에는 시각장애인 도우미견에 대한 개념이 유럽 외 지역 국가들에게 전파되어 일본(1970), 뉴질랜드(1973) 등에 최초의 시각장애인 도우미견학교가 탄생했다.

    02.활동사례

    내사랑 토람이 한빛맹학교 교사 전숙연 저는 현재 보건복지부 장관 인증 장애인보조견. 표지 2000-50호 안내견 '대양'이와 더불어 생활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 제 첫 번째 안내견과의 추억을 담은 수기 "내사랑 토람이"가 드라마로 방영되면서 사람들의 인식 또한 많이 변화되어 요즈음은 퍽 안정된 안내견과의 보행과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되기까지 많은 고통과 인내의 시간을 견뎌 내야만 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1992년 6월 25일, 저희 집 과수원에서 농약 폭발 사고로 심한 화상을 입었습니다. 3년 여의 치료기간 동안 병상은 계속 악화되었고 결국은 실명을 하게 되었습니다. 가장 안타까운 점은 예쁜 딸도 씩씩하던 아들 녀석도 볼 수 없다는 사실이었습니다.서울에서 혼자 생활하였기 때문에 제가 가장 힘들 때에도 제 곁에는 토람이가 있었고, 제가 아플 때에는 든든한 보호자처럼 저에게 위안이 되어 주었습니다. 이렇듯 토람이는 언제나 저의 수호천사가 되었기에 실명 후 처음으로 다시 산다는 것에 대한 가치를 일깨워 주었고 살아 있음에 대한 환희를 느낄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토람이가 얼마나 큰 빛이었는지, 얼마나 소중한 동반자였는지는 토람이가 제 곁을 영원히 떠나고 나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물론 토람이와 함께 하였던 4년 간, 아직도 안내견이 지금보다 더 생소한 시기였던 만큼 우리가 세상으로부터 받았던 홀대와 설움은 이루 말할 수도 없습니다. 국회의사당, 예술의 전당, 세종문화회관, 호텔과 비행기, 크고 작은 식당은 물론 경찰서에서까지 우리는 거부의 표적이기만 하였습니다. 택시를 탄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으며 버스 역시 싫은 소리 듣지 않고 탑승한 적이 거의 없었습니다.

    지하철에서도 승무원들은 별 상관을 하지 않았으나 승객들의 비명과 싫은 소리에는 이력이 생기기도 하였습니다.한 번은 늦은 밤 추위 속에서 떨다가 겨우겨우 타게 된 버스에서 내리지 않으면 가지 않겠다는 기사의 호통에 애원과 사정을 하였으나 속수무책이었을 때 어디선가 나타난 백마 탄 기사와 같은 승객분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하고 간신히 승차할 수 있었던 적도 있습니다. 저와 토람이를 보면 슬그머니 문을 닫아 버리는 차도 많았지요. 요즘 같으면 싫어하는 차는 웃으면서 보내고 다음 차를 기다릴 여유라도 가졌으련만 그 당시는 그 차를 그냥 보내면 다시는 다음 차를 기다릴 용기조차 나지 않을까 그 조그마한 심지라도 지킬 양으로 어찌나 울면서 불면서 굽히기 싫기만 하였던지... 동네 공터에서 대소변이라도 누일라치면 왜 그렇게도 큰소리로 호통을 치던지, 산에 가서 누이는 게 어떠냐는 동네 사람들의 은근한 권유는 제가 안내견을 동반할 수 밖에 없는 시각장애인임은 알고 있는지 조차 궁금할 따름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우리 토람이에게 병이 생겼습니다. 비장출혈이라는 일종의 혈종암이었습니다. 대수술을 하고 갖은 치료를 하였으나 발병 후 두 달만에 토람이는 제 곁을 떠났습니다.

    그 두 달 동안 얼마나 많은 후회와 회한으로 제 가슴을 뜯었던지요. 4년간 '오늘도 무사히'라는 명제로 하루하루를 살다가 기어이 하루도 편히 쉬게 하지 못한 체 제 곁에서 토람이를 보내던 날은, 자식을 잃은 부모의 마음으로 가슴 속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토람이의 짧은 생 동안 이 사회는 토람이를 선뜻 용납하지 않았고 토람이는 제게 왔기 때문에 그렇게 일찍 세상을 떠난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 토람이가 제 가슴 속에만 묻어 두어서는 안 될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토람이는 저와 같은 장애인을 위한 도우미견 이었기에, 도우미견이 세상에서 소외받는 장애인을 위하여 얼마나 훌륭한 역할을 해내고 있는지를 알려 토람이와 같은 희생양이 다시 생기는 일만은 막아야 한다는 사명감이 들었기 때문입니다.그러나 눈물 속에 숨겨 왔던 둘만의 비밀은, 토람이를 잃은 지 2년 뒤인 2003년에야 비로소 털어 놓고 쓰기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비록 이웃에게는 환영받지 못하는 개로 태어났으나 토람이의 일생이 지닌 개 이상의 숭고함을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우리 토람이의 일생이 못난 저 같은 사람보다 얼마나 훌륭하였는가를 말하고 싶었습니다. 다행히 드라마가 방영되고서 주위의 인식은 생각하였던 것 보다 훨씬 나아졌으며, 토람이는 죽어서도 영원히 저와 같은 장애인의 도우미견이었음을 증명해 내었습니다. 그런데, 지난 봄 어느 대형할인마트에서 또다시 대양이가 거부 당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거절에는 이미 익숙하였지만 드라마가 방영되고 너서는 마냥 마음을 놓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다시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당황하였습니다. 마침 남편이 옆에서 거들어 주어 거부 사실에 대한 담당자의 친필서명을 받았습니다. 안내견은 저와 같이 신체에 장애를 가진 자의 독립된 생활을 도와줄 도우미견으로서 보건복지부 장관이 인정하여 특별한 사유가 없으면 공공의 장소의 출입을 허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개라는 이유로 출입에 제지를 당했습니다. 게다가 해당업체 홍보부 측은 종업원이 서명한 사실도 없었을 뿐더러 조금만 기다리면 도와줄 누군가를 보내려 하였는데 화를 내며 그냥 돌아갔다는 왜곡된 거짓 증언을 하여 장애인은 그저 위험하고 귀찮은 존재라는 듯한 인상을 일반 대중에게 주어 저의 인권마저 유린하였습니다. 저는 도저히 저 개인의 일로만 치부할 수가 없었습니다. 대의를 생각하고 스스로 직접 나서지 않으면 누구도 저와 같은 약자를 변호해 줄 파랑새가 없다는 현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제 입장은 잘못된 증언을 바로잡고 공개 사과를 함과 동시에 장애인보조견의 출입을 제한하고 있는 엉터리 사규를 정정하여 장애인의 정당한 구매자로서의 권리를 보장받자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누구도 쉽게 제 의견에 귀를 기울여 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곧 '내사랑 토람이' 동호회를 통하여 이 사실이 알려지게 되었고 많은 분들이 제게 용기를 주셨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개를 싫어하더라도 목적견으로 인정받고 있는 도우미견들을 허용해 주시기를 희망할 뿐입니다. 사회의 따가운 시선은 충분히 교육을 받은 안내견을 데리고서도 독립된 생활을 주저하게 만듭니다. 저는 단지 제 선택을 존중받고 주위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롭고 싶을 뿐입니다.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은 그 자체를 인정하고 사랑하는 것이 사랑의 진정한 조건이라 하였습니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서로를 존중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이 사회는 나눔이 이루어지는 사람이 살아가는 따뜻한 공간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